23.02.02
조선일보 인터뷰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일을 맡기세요.”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특징을 전면에 내세운 회사가 있다. 웹 디자인과 애플리케이션 개발, 그래픽 디자인, PR 컨설팅을 하는 IT 디자인회사 ‘별주머니’다. 별주머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주머니들’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됐던 여성이다. 별주머니를 세운 박슬아 대표 역시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기자를 거쳐 홍보와 마케팅 일을 하다 출산과 함께 퇴직했습니다. 첫아이를 키울 때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일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둘째까지 키우면서 ‘내가 과연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러다 점점 ‘일은 무슨. 애들이나 재미있게 키우자’고 마음먹었죠.”
디자인을 전공한 엄마들이 뭉치다
일을 쉰 지 4년 만인 바로 그때 프리랜서로 다시 일할 수 있었다. 데이터베이스 컨설턴트인 남편의 일 때문에 중국에 살면서 지역축제 홍보 일을 맡게 됐다. 아이들 때문에 풀타임으로 일하기는 어려웠지만 반나절만 도우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보수는 많지 않았지만 다시 일할 기회가 주어진 게 기뻤다. 그 후로도 알음알음 일이 들어와 프리랜서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IT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그들에게 “경력이 풍부한 전문가인데도 아이를 키우느라 풀타임으로 일할 수 없는 여성이 제 주변에 많습니다. 집에서 파트타임으로는 얼마든지 일할 수 있으니, 일을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한 분이 일을 맡겨주셨고, 결과물에 매우 만족하셨습니다. 2013년 그분과 함께 회사를 세워 일할 수 있는 엄마들을 모으기 시작했죠.”
현재 그는 디자인을 전공한 대학 선후배 등 10명의 엄마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5~6년 혹은 10년 이상 직장을 다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워 퇴직했던 엄마들이다. 지금도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고 싶은 디자이너와 개발자, 기획자를 상시 모집하고 있다. 별주머니와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은 고객과 미팅할 때만 빼면 재택 근무를 하면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컴퓨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팀을 따로 둘 여력이 없는 작은 중소기업들의 일을 많이 맡습니다. 명함과 고객 선물용 달력부터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 개발, BI(BRAND IDENTITY)・CI(CORPORATE IDENTITY) 디자인, 홍보마케팅 조언까지 하면서 회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도록 도와드립니다. 우리 스스로 ‘비즈니스의 시작을 도와주는 회사’라고 자부하고 있지요. 우리 회사에서는 10년 이상 경력자가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5~6년 경력이면 보조 역할을 합니다. 디자이너의 경력이나 실력 면에서는 어느 회사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의뢰 기업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적은 비용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고, 디자이너들은 직장에 다닐 때 이상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충분한 보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부 경험이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주부만큼 멀티태스킹에 능한 사람이 있을까요? 제 머릿속에서는 저와 남편, 아들과 딸의 스케줄이 동시에 돌아갑니다. 아들, 딸보다 까다로운 고객이 있을까요? 아들을 씻길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누칠하고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샤워기를 들이대면 끝이었지만, 타고난 공주님인 딸을 같은 방식으로 씻기니 울고불고 난리가 났죠. 미용실 의자를 살까 고심하다 결국 눈에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게 샤워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까다로운 고객의 비위도 맞춰왔으니 고객들의 웬만한 요구는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죠. 엄마란 세상에서 일을 제일 잘할 수 있는 존재,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의 달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헌신을 요구하는 아이를 키우는 일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존재로 훈련되는 과정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전에는 저도 까칠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인간관계보다 일을 중시해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했죠. 처음 아이를 키울 때는 ‘나를 왜 이렇게 꼼짝 못 하게 할까’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 아이 엄마로 사는 일을 열심히 재미있게 하자고 마음먹었죠. 평범한 일상이 쌓여 사람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의뢰받을 때 그는 일부러 기한을 넉넉하게 잡는다.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야 할 엄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다.
“5일 만에 마칠 수 있는 작업이면 보통 7일 후에 드리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4~5일 만에 완성해 고객에게 드리면 ‘일찍 끝냈다’고 더 좋아하세요. 그게 약속을 어기지 않으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입니다. 디자이너에게 ‘왜 그렇게 빨리 일을 마쳤느냐?’고 물으면 ‘신이 나서 재미있게 일하다 보니 다 해버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일에 치여 지내느라 창의력이 고갈됐었는데, 다시 일하게 되니 의욕이 샘솟는다고 하면서요. 저도 내내 아이들과 지내다 밤에 혼자 일하는 시간이 정말 재미있고 좋아요.”
그는 파트너들이 계속 별주머니에서만 일하기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를 웬만큼 키우고 나면 다시 풀타임 직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죠. 저는 여성들이 아이를 잘 키우면서 자신의 꿈도 놓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일과 가정이 균형 이루는 사회를 위하여
집안 사정을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다른 직장과 달리 별주머니에서는 엄마들의 사정을 100% 이해해준다. 아이를 맡길 곳을 영 찾지 못하면 미팅에 데리고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책임감 없이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프리랜서의 세계는 냉엄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객이 100을 요구할 때 150까지 해내면서 최선을 다해준 엄마들이 많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다들 ‘이번 프로젝트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프리랜서로 일하지만 그분들이 별주머니의 주인입니다.”
박 대표는 “엄마들이 아이를 키우는 동안에도 실력을 갈고닦아 경쟁력을 키우면서 경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 맞추기입니다. 일에 몰두하다 보면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밥할 시간이 없어 외식으로 때우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다 미안해져 ‘엄마가 완벽하지 않으니 이해해 달라’고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완벽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과 가정생활 둘 다 잘하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쪽이 넘치면 덜어내고 한쪽이 모자라면 채워 넣으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렇게 균형을 잡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둘 다 잘해낼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는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어려운 사회 현실이 안타깝지만, 아이 키우기는 짐이 아니라 큰 축복이자 특권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한다.
“회사 대표로서의 뿌듯함만큼 두 아이를 키우는 일도 자랑스럽습니다. 일을 끝냈을 때 성취감도 굉장히 크지만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깔깔거리면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때의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엄마들이 너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박노해의 시처럼 엄마는 가장 먼저 뜨는 별이 아니라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별이 될 수 있으니까요.”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결혼과 출산을 피하는 게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개인과 가정의 행복, 사회적 소명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꾼다는 그는 “우리 같은 회사, 그런 회사를 찾아주는 고객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정책도 바뀌어 나간다면 느리더라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